며칠 전 본 뉴스 하나가 오래도록 뇌리에 박혔다. 경기도의 한 카페 수조에서 멸종위기종인 백상아리 새끼가 발견된 사건이다. 업주는 “보호하려고 사왔다가 방류했다”고 해명했지만, 수족관 환경에서 백상아리가 버틸 수 없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 해프닝을 넘어, 우리가 ‘보호’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무지와 오만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 독서와 콘텐츠를 주로 다루는 블로거지만, 가끔 이런 시사 단상도 자연스럽게 풀어보고 싶다. 이번 글은 그런 맥락에서, ‘보호’와 ‘자연의 경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본다.
사건의 발단은 한 시민의 신고였다. 카페 수조에서 백상아리로 의심되는 상어가 유영하는 모습을 본 시민이 해양경찰에 신고했고, 현장 확인 결과 실제 백상아리 새끼(약 1m)였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업주는 “멸종위기종을 보호하려고 구매했다”고 주장했지만, 해당 종은 국제적 멸종위기종으로 사육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업주가 낸 해명은 ‘보호’라는 명분이 오히려 어떤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사건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이중적 태도다. 한편으로는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편의와 호기심을 위해 자연을 가둬두고 관람하려 한다. 이 카페 업주도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호’라는 말이 ‘소유’와 ‘통제’로 전락하는 순간, 그 대상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전시물이 된다. 이러한 이중성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반려동물을 키우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제약하고 인간의 생활 방식에 맞추려 한다. 개를 산책시킬 때 목줄을 채우는 것은 안전을 위한 필수 조치지만, 때로는 과도한 통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백상아리를 수조에 가둔 것은 ‘보호’라는 미명 아래 이뤄진 극단적인 통제의 사례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2010년대 이후 이색 카페가 유행하며 살아있는 동물을 전시하는 경우가 늘었다. 미어캣, 라쿤, 심지어 악어나 뱀까지 등장했다. 이런 카페들은 대부분 ‘체험’과 ‘치유’를 내세우지만, 동물복지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아이가 동물을 좋아해서 자주 간다”며 미어캣 카페를 추천했는데, 막상 가보니 미어캣들은 스트레스로 털이 빠지고 무기력한 상태였다. 그때 ‘보호’가 아니라 ‘착취’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또 다른 사례로, 제주도에 있는 한 카페는 바다거북을 수조에 넣어 전시했는데, 방문객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 바람에 거북이 시력을 잃을 뻔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이런 일들은 동물의 복지보다 인간의 즐거움이 우선시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멸종위기종의 사육이 생태계 교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위키백과의 백상아리 문서에 따르면, 백상아리는 이동성 상어로 수조 환경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수명이 급격히 단축된다. 실제로 수족관에서 백상아리를 성공적으로 사육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며, 대부분 조기 폐사했다. 이번 카페의 백상아리도 결국 방류되었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부적절한 환경에 노출된 점은 우려스럽다. 더욱이, 멸종위기종의 불법 거래는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세계자연기금(WWF)에 따르면, 불법 야생동물 거래는 연간 200억 달러 규모로, 마약, 무기, 인신매매 다음으로 큰 불법 시장이다. 이번 사건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이러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연을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보기에 좋은 방식으로 자연을 재단하고 있는가? ‘보호’라는 단어는 종종 인간의 편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야생동물 구조’라는 명목으로 불법 포획이 자행되거나, ‘생태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서식지가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동물 복지 문제를 넘어,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나는 최근에 『침묵의 봄』을 다시 읽었는데, 레이첼 카슨이 1960년대에 이미 경고했던 ‘인간의 오만’이 아직도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결국 우리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백상아리 사건은 그 경고가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킨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태계는 상호 연결된 복잡한 그물망이며, 한 종의 부재나 왜곡된 사육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이번 백상아리 사건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생태적 시민의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그 원두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열대우림이 파괴되지는 않았는지, 동물 서식지가 훼손되지는 않았는지 고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물 카페를 이용할 때도 그 업소가 동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책임이다.
앞으로 어떤 전망이 가능할까? 우선, 관련법의 강화가 필요하다. 현행법상 멸종위기종 거래는 엄격히 규제되지만, 업주들이 ‘보호’라는 핑계로 우회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또한 시민들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다. 동물을 전시하는 카페를 이용할 때, 그 동물이 적절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 진정한 보호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동물원이나 수족관의 역할 자체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교육과 보전을 목적으로 한다면,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한 대안도 고려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일부 과학관은 실제 동물 대신 홀로그램을 전시하여 교육 효과를 높이면서도 동물 복지를 해치지 않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보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보호는 상대방의 필요를 존중하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카페 수조 속 백상아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의 ‘보호’가 오히려 나를 가두고 있다고.
앞으로 우리는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그 시작은 아마도,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일일 것이다. 백상아리는 바다에 있어야 빛난다. 마치 책이 서가에 꽂혀 있어야 제 가치를 발휘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