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처럼 들려오는 문장들, 그 고통을 읽는 법

며칠 전, SNS 타임라인에서 우연히 한 문장과 마주쳤다. ‘가자(Gaza)의 고통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저 단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비명을 듣는 일이다.’ 한겨레 기사(비명처럼 들려오는 문장들…‘가자’의 고통을 번역하다)에 실린 번역가의 말이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평소 책을 좋아하고 번역서를 즐겨 읽는 사람으로서, 번역이라는 행위를 단순한 언어 전환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마치 내 귀를 때리는 듯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기사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번역가의 인터뷰 중 ‘나는 가자의 아이들이 쓴 시를 번역하면서, 그들의 웃음소리까지도 옮기고 싶었다’는 대목에서 눈물이 났다. 번역이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고통을 내 언어로 재현하는 일임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비명처럼 들려오는 문장들, 그 고통을 읽는 법

사실 나는 최근 몇 년간 주로 자기계발서나 가벼운 소설만 읽어왔다. 직장 생활에 지쳐 머리 아픈 책은 피하게 되더라. 그런데 그 기사를 읽고 나니, 번역가가 전쟁과 폭력의 현장을 어떻게 언어로 옮기는지 궁금해졌다. 단순한 기술의 문제일까, 아니면 윤리의 문제일까. ‘가자’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요즘, 번역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주에 나는 우연히 ‘가자: 일상의 기록’이라는 에세이를 집어 들었다. 그 책은 가자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가 쓴 일기 형식의 글인데, 번역가의 서문에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이 나를 더 깊이 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번역은 결코 중립적인 작업이 아니다. 원문의 뉘앙스, 문화적 맥락, 심지어 작가의 의도까지 고려해야 한다. 특히 고통을 다룬 텍스트는 더욱 섬세함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아랍어 ‘sumud(인내, 저항)’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완벽히 대응하는 표현이 없다. 번역가가 ‘저항’으로 옮기면 정치적 색채가 강해지고, ‘인내’로 옮기면 수동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선택이 독자의 이해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실제로 한 팔레스타인 소설의 번역가를 인터뷰한 글에서, 그는 ‘sumud’를 ‘끈질긴 생존’으로 번역했다고 밝혔다. ‘끈질긴 생존’이라는 표현은 능동성과 고통을 동시에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번역가는 단어 하나에 수많은 고민을 쏟아붓는다.

이러한 고민은 단지 번역가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뉴스를 읽을 때, 어떤 단어가 선택되었는지에 따라 사건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공습’과 ‘폭격’, ‘민간인 사상자’와 ‘희생자’ 등. 미묘한 차이가 감정을 자극한다. 최근 국내 언론에서조차 ‘하마스’를 ‘무장단체’로 칭할지 ‘저항세력’으로 칭할지 논쟁이 벌어졌다. 언어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나는 이 점을 더 확실히 깨닫기 위해, 같은 사건을 보도한 두 신문의 기사를 비교해보았다. 한 신문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10명 사망’이라고 썼고, 다른 신문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희생자 10명 발생’이라고 썼다. ‘공습’과 ‘폭격’의 차이는 작지만, ‘사망’과 ‘희생자’의 차이는 훨씬 크다. ‘희생자’라는 단어는 무고한 죽음을 강조하는 반면, ‘사망’은 중립적이다. 이런 선택이 독자의 감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 언어의 정치성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지난주 점심시간에 동료와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료는 “그런 거 신경 쓰면 책도 못 읽어”라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번역의 정치성을 의식하면 더 깊이 읽게 된다. 실제로 나는 최근 팔레스타인 시집 ‘나는 무엇을 위해 노래하는가’를 읽으면서, 번역가의 각주에 주목했다. 각주에는 ‘이 단어는 원어민에게 울림이 크다’는 식의 설명이 달려 있어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시집에서 ‘잿빛 하늘’이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각주를 보니 원문은 ‘하늘’이 아니라 ‘سماء’라는 단어로, 이슬람 문화에서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번역가가 ‘하늘’로 단순화하지 않고 ‘잿빛 하늘’로 번역한 이유를 알게 되니, 시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 다양한 번역서를 찾아보게 만들었다. 특히 ‘번역’ 자체를 주제로 한 책들에 꽂혔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중 번역에 관한 에세이, 혹은 데이비드 벨로스의 ‘섬: 지구의 작은 섬들’ 번역판을 읽으며 번역가의 고충을 엿보았다. 번역은 단순히 직역이 아니라 재창조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김영하는 에세이에서 ‘번역은 원작을 죽이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썼다. 이 말이 와닿았다. 번역가가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창조적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번역의 어려움은 언어적 차이에서만 오지 않는다. 출판 시장의 상업적 압박도 큰 변수다. 베스트셀러 위주의 번역이 늘면서, 전문 번역가가 아닌 사람들이 급하게 번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품질 저하로 이어지고, 결국 독자가 피해를 본다. 한겨레 기사에서도 ‘번역자의 낮은 처우’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번역가의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 고통의 문장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 출판사 관계자는 ‘번역료가 너무 낮아서 전문 번역가를 구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는 결국 독자에게 돌아온다. 값싼 번역으로 인해 원서의 깊이가 사라지고, 독자는 피상적인 내용만 접하게 된다.

이 문제는 더 큰 사회적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최근 ‘번역가 노동권 보장을 위한 시민 모임’이라는 단체의 캠페인을 SNS에서 보았다. 그들은 번역가의 적정 임금과 저작권 보호를 요구했다. 이런 움직임이 더 확산되어야 한다. 독자로서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좋은 번역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책을 읽을 때 번역가의 이름을 꼭 확인하고, 후기를 남길 때 번역 품질에 대한 의견을 포함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독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번역서를 고를 때 출판사와 번역가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유명 번역가의 작업은 믿을 만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황석희 번역가의 작업은 항상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 둘째, 후기를 남기거나 SNS에서 번역 품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된다. 셋째, 직접 다른 언어를 배우려는 시도도 의미 있다. 나도 요즘 아랍어에 관심이 생겨 인강을 찾아보고 있다. 물론 쉽지 않지만, 원문의 맛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은 마음이다. 아랍어를 배우면서 ‘알라’라는 단어가 단순히 신을 넘어 ‘숭고함’의 의미를 지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미묘한 차이가 번역의 어려움을 더 실감나게 한다.

미래를 전망하자면, AI 번역의 발전이 이 논의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딥러닝 기반 번역기는 빠르게 발전했지만, 고통과 같은 감정적 뉘앙스는 아직 잘 잡아내지 못한다. AI가 ‘슬픔’과 ‘비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인간 번역가의 역할은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의 가치가 재조명받는 셈이다. 최근 구글 번역이 ‘가자 지구’를 ‘Gaza Strip’으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한 사례가 있었다. ‘Strip’이라는 단어가 원래 ‘지역’을 뜻하지만, ‘가자 지구’라는 고유명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실수는 AI가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결국, 번역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공감의 행위다. 우리가 다른 언어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언어가 담은 역사와 감정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 번역가의 어깨에 놓인 책임이 무겁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앞으로 책을 고를 때, 나는 번역가의 이름을 더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그들의 손길이 닿은 문장 하나하나가, 먼 곳의 비명을 나에게 전해주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한다. 앞으로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번역가의 노고를 기억하고, 그들의 작업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번역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고민을 직접 듣고 싶다. 번역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다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