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번역, 그 사이에서 발견한 나만의 독서법

며칠 전 우연히 본 뉴스 한 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문학 창작지원금이 경력별로 세분화되고, 고전과 근현대 걸작 번역을 지원한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어판 기사를 읽으며 문득 내 책장을 스쳤다.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달았다. 일본 소설, 영미 에세이, 프랑스 철학까지, 나는 늘 번역의 힘을 빌려 세계를 여행해왔다. 사실 내 첫사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는데, 그때는 번역가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와타나베 토오루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섬세한 문장 하나하나가 번역가의 피와 땀이라는 것이 놀랍다.

문학과 번역, 그 사이에서 발견한 나만의 독서법

번역은 단순한 언어 전환이 아니다. 문화와 정서를 옮기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 토오루의 목소리로 읽히지만, 번역가의 선택에 따라 그 울림이 달라진다. 나는 같은 책을 두 가지 번역판으로 읽어본 적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 하나만 봐도 원제 ‘Norwegian Wood’가 주는 느낌과 한국어 제목이 주는 감성이 사뭇 다르다. 이렇게 번역은 독서 경험의 첫 관문이다. 더 나아가, 번역은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예컨대 일본어의 ‘사비(寂び)’는 단순히 ‘쓸쓸함’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그 깊이를 살리기 위해 번역가는 수많은 고민을 한다. 나는 최근 『고양이를 버리다』(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판을 읽으며, ‘고양이’라는 단어가 일본어 ‘네코(猫)’가 가진 친근감과 애틋함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감탄했다.

지난주에도 나는 점심시간에 동료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최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감동받았지만, 원서로 읽었다면 느꼈을 온기가 덜 전해졌을 거라고 말했다. 맞다. 번역가는 저자의 목소리를 우리 귀에 맞게 조율하는 연주자와 같다. 그래서 이번 정부 지원책이 반갑다. 특히 근현대 걸작 번역 지원은 단순한 문화 사업을 넘어, 우리가 놓친 사상과 감수성을 되살리는 기회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문학은 당대의 혁명과 고통을 담고 있지만, 번역본이 오래되거나 단절되어 현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지원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번역판이 나와 그 시대의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은 분명하다. 번역서 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지만, 질적 편차가 심하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번역이 쏠리면서 고전이나 마이너 작품은 소외된다. 예컨대 러시아 문학이나 동유럽 소설은 번역본을 찾기 어렵고, 있다 해도 오래된 판본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력별 지원금 세분화는 참신한 접근이다. 신진 번역가에게는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경력자에게는 깊이 있는 작업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력별 지원은 번역 시장의 ‘샌드위치 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 신진은 수익이 불안정하고, 중견은 대형 프로젝트에 밀리며, 고경력자는 소외되는 문제를 해결할 단초가 될 수 있다.

원인을 좀 더 살펴보자. 번역 시장의 불균형은 수익성 문제에서 비롯된다. 출판사는 팔릴 만한 책에 투자하고, 번역가에게 적정한 원고료를 주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번역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인데도 낮은 대우에 시달린다. 나는 한 지인의 사례를 떠올린다. 그녀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10년째 일하는데, 자신이 번역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돼도 추가 수익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정부의 지원이 이런 현장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한국번역가협회에 따르면, 번역가의 평균 원고료는 10년째 제자리걸음이며, 인세 수익은 대부분 출판사와 저작권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직접 지원뿐 아니라, 번역가의 권리 보호와 공정한 계약 관행이 필요하다.

사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최근 몇 년간 주목받은 번역서 중에는 ‘쇼코의 미소'(최은영 작가)처럼 한국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 번역된 경우도 있지만, 수입 번역서가 여전히 주류를 이룬다. 일본 문학은 특히 인기가 많아서,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미야베 미유키 등의 작품이 꾸준히 번역된다. 하지만 프랑스나 독일 문학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런 편중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번역 지원이 장르와 국가를 다양화해야 한다. 이번 정책이 그 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권 문학은 마르케스나 보르헤스 외에도 수많은 걸작이 있지만, 번역본이 부족하다. 지원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새로운 물결이 한국 독자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전망은 긍정적이다. 번역 지원이 활성화되면 독자들은 더 다양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고, 번역가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다. 특히 고전 번역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플라톤이나 셰익스피어는 여러 번역가에 의해 재해석되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런 작업이 체계적으로 지원된다면, 우리는 더욱 풍성한 독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번역 지원은 문화 외교의 일환이 될 수도 있다. 한국 문학의 해외 번역도 함께 지원된다면,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최근 『채식주의자』의 해외 성공처럼, 번역은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힘을 지녔다.

마지막으로 내 경험을 하나 더 나누자. 얼마 전 나는 번역서와 원서를 비교하며 읽는 취미에 빠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일본어 원서와 한국어 번역본으로 동시에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번역가의 선택이 드러나는 순간이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僕は孤独だ”라고 말할 때, 번역본은 “나는 외롭다”가 아니라 “나는 고독하다”로 옮겨졌다. 이 작은 차이가 캐릭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이렇게 번역은 단순한 직역이 아니라 해석이자 창작이다. 또 다른 예로,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코가 “私、もう駄目かもしれない”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번역본은 “나, 이제 안 될지도 몰라”로 옮겼는데, 원서의 절박함과 체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경험은 번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준다.

앞으로도 나는 번역서를 읽을 때면 그 뒤에 숨은 번역가의 노력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지원 정책을 계기로, 더 많은 걸작이 우리 언어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독서는 혼자 하는 행위지만, 번역은 수많은 사람의 협력으로 완성된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책장을 넘긴다. 이제는 번역가의 이름을 더 자주 기억해야겠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 혹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법을 결코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