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뉴스에서 ‘군체 좀비를 피해 탈출하는 공연’이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영화관과 영화 IP를 활용한 공연이 선보인다고 한다. 단순한 공포 체험을 넘어, 관객이 직접 좀비를 피해 도망치는 능동적 참여형 콘텐츠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문학과 영화에서 익숙한 좀비가 이제는 공연 예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보며 나는 문학 속 공포의 변천사를 떠올렸다. 19세기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무서웠던 이유는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생물학적 위협보다, 그가 밤에만 활동하며 정체를 숨긴다는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반면 요즘 좀비물은 ‘군체’라는 개념이 핵심이다. 개별 좀비는 느리고 멍청하지만, 무리를 지으면 어떤 장애물도 돌파하는 집단 지성의 공포다. 이는 현대 사회의 시스템 위험과 닮아 있다. 금융 위기, 팬데믹, 가짜 뉴스의 확산 — 모두 개인보다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공포라는 점에서 좀비와 닮았다.

사실 공포는 시대의 거울이다. 1950년대 미국 SF 영화가 원자폭탄에 대한 공포를 반영했다면, 2000년대 이후 좀비물은 글로벌 팬데믹과 과잉 소비 사회에 대한 불안을 담아냈다. 영화 ‘부산행’이 성공한 이유도 좀비를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이기적인 인간 군상의 비판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좀비에게 물리면 12초 만에 감염된다는 설정은, 현대 사회의 빠른 전염성과 무방비 상태를 상징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공포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공포 테라피’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좀비룸을 체험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다. 위키백과 ‘공포 테라피’ 항목에 따르면, 통제된 환경에서 공포를 경험하면 오히려 불안이 줄어든다고 한다. 마치 책을 읽으며 간접 경험을 하는 것처럼, 공연에서 좀비를 피해 달리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문학과 이런 체험형 콘텐츠의 접점을 자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의 ‘미저리’는 작가와 광팬의 관계를 공포로 그렸지만, 독자의 집착이라는 현실적 주제를 다룬다. 또 ‘설국열차’는 계급 갈등을 극한의 생존으로 풀어냈다. 문학이 주는 공포는 상상력에 기반하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 반면 체험형 공포는 즉각적이고 신체적이다. 두 형식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 공포가 본능적이면서도 지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번 좀비 공연이 성공할지 궁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시도가 긍정적이라고 본다. 문학이 점점 전자책과 오디오북으로 확장되고, 영화와 게임, 공연이 결합하는 시대다. 공포라는 장르가 그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단순한 스릴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여전히 좋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결국 좀비도, 뱀파이어도, 외계인도 — 다 인간의 두려움을 형상화한 것일 테니까.